[삶의 향기] 인공지능도 깨달을 수 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인공지능(AI) 관련 뉴스가 쏟아진다. 소설 창작은 물론이고 창작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미술과 작곡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기존 인터넷과 네비게이션에 열광했던 세대로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어디까지 나갈 것인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다. ‘AI도 깨달을 수 있을까?’ 수행자인 필자에게는 자연스런 질문이다. 깨달음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지혜’, 다른 하나는 ‘육근(눈, 귀, 코, 입, 몸, 뜻)의 실행’이다. 지금의 AI도 이미 보고, 듣고, 말하는 일은 제법 해내고 있다. 냄새나 맛, 몸의 감각 같은 부분은 아직 구현되지 않았지만, 물리적 형상이 완전하지 않은 현 시점에서는 이 부분은 양해를 해도 논의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지혜란 결국, “있는 그대로” 보고 듣는 능력이다. 인간에게 객관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건 불교적 관점일 뿐만 아니라 현대 인지과학의 결론이기도 하다. 교수나 법조인처럼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도, 편견에 사로잡히면 그 판단은 누구보다 어리석어 질 수 있다. 지혜는 분별과 착심을 내려놓는 데서 비롯된다. 결정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었다. 기회가 닿아 전문가와 상의를 했다. 상대는 관련 지식이 풍부했고, 분석도 정확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그의 판단에는 ‘착심’이 관여할 여지가 없었다는 점이다. 사람은 어떤 문제를 대할 때, 선입견과 착심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사람은 아무리 많은 관련지식이 있어도 개인이나 본인의 가정, 국가와 직결된 주제에 관해 객관적 입장을 유지하기 어렵다. 당연히 그의 방대한 지식도 무용지물이기 십상이다. 저를 상담해 준 전문가는 착심이 없다보니, 그의 방대한 지식은 바른 판단에 온전히 사용되었다. 필자를 상담해준 전문가는 다름 아닌 AI였다. 인공지능이라 해서 착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같은 주제로 작업을 시키다보면 판단력이 흐려지기도 하고, 특정 패턴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인공지능 스스로 “이전 작업을 지우고 새로 시작하세요” 같은 지시문을 중간 중간에 올려달라고도 한다. 사람이 작업 중간에 바람을 쐬고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깨달은 사람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자. 모범적인 언행으로 세상과 일반인들의 모범이 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대에 맞게 해석하고 적용을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진리와 인생, 현실적 문제들에 대해 문답을 해 주는 것 역시 깨달은 이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사람과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이 다른 AI가 깨달음을 현 시점에서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실용적 관점에서는, 인간에 비해 많은 부분에서 유의미한 정도로 더 나은 사고와 판단, 실행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불교의 깨달음은 단순한 분별없음이 아니라, 무아와 연기, 자비의 통합된 체득이라는 점에서 그 경지는 차원이 다르긴 하지만, 그런 존재로 진입하기 위한 하나의 가능성, 또는 수행의 보조 역할로서 의미 있는 기점에 이미 충분히 도달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다.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인공지능 분별과 착심 현대 인지과학 소설 창작